

김정남
KIM Jung-Nam
- 생년월일01/28/1943
- 국적대한민국
- 부문지도자
- 지도경기537
- 승210
- 승률39.1%
- 우승2
- 올해의감독상1
김정남 감독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대체로 일관성이 있다. 인격적으로 훌륭하고, 매사에 성실하며, 자기관리에 투철한 지도자라는 것이다. 그가 선수로서 전성기였던 1960년대 중반에서 1970년대 초반이나, 지도자로 일찌감치 절정을 누렸던 1980년대의 국내 스포츠계는 지금보다 휠씬 더 ‘터프’했기에 그의 이러한 덕목은 상대적으로 더 돋보일 수밖에 없었다.
만 80세의 고령인 김정남 감독은 2023년 5월 2일 열린 ‘K리그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 건강 문제로 직접 참석하지 못했고 손자 김민석씨가 대리 수상자로 나섰다. 수상 소감을 대신 전한 손자는 이렇게 회상을 이어갔다. “할아버지께서 항상 저에게 말씀하셨다. ‘민석아, 겸손해야 해’, ‘민석아, 열심히 해야 해’, ‘그 두 가지만 기억해!’ 지금도 가슴 속에 새기는 말이다.”
손자가 전한 겸손해야 하고, 열심히 해야 한다는 가치관만큼 그의 수상 이유를 더 적확하게 설명하기는 힘들 것같다. 화려해 보이지는 않았고, 일견 무색무취해 보이기도 했지만 누구보다도 기본에 충실했던 그는 차곡차곡, 묵묵히 돌을 쌓아올려 누구도 넘보기 힘든 금자탑을 만들었다. K리그 명예의 전당 지도자 부문 최초의 헌액자는 유공에서 8시즌(1985~1992년)과 울산 현대에서 9시즌(2000~2008년)을 지내면서 K리그 통산 210승 168무 159패를 기록하며 두차례 정규리그 우승(1989년, 2005년)을 차지한 명장 김정남 감독이다.
영어를 잘하던 ‘공부하는 축구선수’, 국가대표팀 지도자가 되다
모친의 반대는 외삼촌의 후원으로 극복해 냈다. 축구선수 출신인 외삼촌이 어머니를 열심히 설득해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보성고에 진학한 뒤 축구에 대한 열망은 더 커졌다. 당시 고교 축구는 실력차가 워낙 커서 동북고, 배재고, 중동고, 한양공고, 영등포공고의 5개팀을 1부로 운영했고 나머지 학교는 2부로 분리했다. 김정남은 당연히 1부에서 뛰고 싶었다. 또다시 외삼촌의 도움으로 한양공고에 전학갈 수 있었다. 다만 한양공고에 워낙 뛰어난 선수가 많다보니 주전으로 뛰기 위해 포지션이 수비수로 변경됐다. 적응도 빨라 고 3때인 1962년 상반기 청소년대표팀에 선발됐고, 그해 가을 연이어 국가대표팀 2진으로도 뽑혔다.
“사실 고3인데 대표팀에도 뽑히니까 어린 마음에 우월감과 자만심이 생겼어요. 제가 무척 잘하는 줄 알았죠. 그런데 국제대회에 나가보니까 저보다 잘하는 선수가 너무 많더군요. 처음 한양공고에 와서 받았던 충격과도 비슷했어요. 더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이들을 따라잡을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대한축구협회t 홈페이지, ‘나의 선수시절’ 인터뷰, 2010년 11월)
국가대표 선수 시절은 짧은 영광과 긴 좌절로 정리될 수 있다. 단지 그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그 시대 우리 국가대표팀의 한계가 그랬다. 아시아에서는 어느 정도 정상권을 유지하면서 패자(覇者)를 자처했지만, 월드컵이나 올림픽같은 세계 무대를 향한 도전에서는 번번히 실패했다. 국가대표 1진 청룡의 주장으로 1970년 메르데카컵, 킹스컵, 방콕 아시안게임 등 아시아 지역 주요 국제대회 3관왕을 차지한 것은 선수 경력의 하이라이트였다. 하지만 세계 무대로의 도전은 좌절의 연속이었다. 아시아의 복병 말레이시아나 오세아니아의 강호 호주가 대한민국의 발목을 잡았다. 멕시코시티 올림픽(1968년), 멕시코 월드컵(1970년), 뮌헨 올림픽(1972년), 서독 월드컵(1974년) 등 주요 메이저대회의 아시아지역 예선에서 국민의 애간장만 녹인채 탈락을 반복했다. 최종 수비라인을 책임졌던 그는 늘 고개를 숙였다.
장덕진 대한축구협회 회장은 그를 한국 축구를 이끌고 나갈 미래의 인재로 꼽았고, 호주 휴학을 주선해 줬다. 귀국후 사실상의 현역 은퇴를 하고 외환은행에서 트레이너로 지내던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서독 월드컵 예선 탈락으로 충격을 받았던 축구협회가 1974년 각종 대표팀 운영체계에 큰 변화를 준 것이다. 7명의 전임 지도자를 선발해 이 중에서 각종 국제대회 파견 코칭 스태프를 짜겠다는 구상이었다. 김정남은 여기에 뽑히면서 새로운 길이 열리게 됐다. 현역에서 은퇴한지 얼마 안됐고, 지도자 경험도 일천했던 것을 고려하면 파격적인 발탁이었다. ‘될성싶은 나무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격언이 떠오른다.
대한민국 축구의 새 역사를 연 국가대표 사령탑 시절
김정남 감독이 명장의 입지를 일찌감치 굳힌 것은 사실 K리그 보다는 국가대표 사령탑을 통해서였다. 특히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이후 무려 32년만에 숙원의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본선 진출을 이뤄내면서 한국 축구사에 새 역사를 연게 결정적인 계기였다. 이후 2022년 카타르 월드컵까지 10회 연속 본선 진출을 이어가게 된 시발점이었다.
그가 대표팀 지도자로 처음 발탁된 것은 1974년 10월 4일이었다. 제7회 킹스컵에 나서는 대표팀에 함흥철 감독을 코치로서 보좌했다. 이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국가대표 지도자로서 순조로운 출발을 했다. 이후 함흥철, 문정식, 최정민, 최은택 등 한국 축구의 거인들 밑에서 코치를 역임하면서 지도자로 성숙되어 갔다.
1980년대는 ‘김정남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1986년 멕시코 월드컵과 서울 아시안게임, 1988년 서울 올림픽 등 80년대를 상징하는 대회를 모두 지휘했다. 동시대 박종환이라는 강력한 라이벌이 존재했지만, 막상 메이저 대회 사령탑은 늘 김정남의 차지였다. 그에게는 실력과 행운이 함께 했다. 김정남은 80년대를 호쾌하게 열었다. 1980년 쿠웨이트에서 열린 아시안컵 준결승전에서 한국이 선제골을 내준 뒤 정해원의 연속골로 북한을 2-1로 꺾은 경기는 지금도 역대급 명승부로 손꼽힌다. 결승에서는 조별리그때 3-0으로 완승을 거뒀던 개최국 쿠웨이트에게 지면서 준우승에 그쳤지만 귀국후 카 퍼레이드를 펼칠 정도로 파급력이 컸다.
온 국민의 비원을 담고 출발했던 멕시코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도 처음에는 ‘문정식 감독~김정남 코치 체제’였다. 하지만 예선 1차전때 말레이시아에게 충격의 0-1 패배를 당하면서 문 감독이 자진 사퇴했고 결국 ‘김정남 감독-김호곤 코치 체제’로 재편됐다. 이 양김 체제가 이후 80년대의 월드컵, 아시안게임, 올림픽을 모두 책임졌다.
“말레이시아에 가서 첫 경기를 졌다. 그 경기를 지면 거의 (예선 통과)기회가 없다고 봐야 했다. 국민들도 많이 실망했다. 문정식 감독님은 저와 상의도 없이 돌아오자마자 사퇴서를 내셨다. 그래서 내가 감독을 맡게 됐다. 아마도 누가 감독을 하든 결과가 뻔하니 네가 맡아서 마무리하라고 했던 거같다.(웃음) 그래서 김호곤을 코치로 해서 대표팀을 맡았다.” (대한축구협회 홈페이지, ‘더 레전드’ 인터뷰, 2016년 11월)
1986년에는 멕시코에 가서 한국축구 사상 월드컵 본선 첫 골(박창선, 아르헨티나전), 첫 승점(1점, 불가리아전 1-1 무승부)을 기록했고, 서울 아시안게임에서는 금메달을 차지했다. 김정남은 선수로(1970년 방콕), 코치로(1978년 방콕), 감독으로(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을 세 번이나 우승하는 진기록을 남겼다. 다만 많은 기대를 모았던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는 홈 그라운드의 이점에도 조별리그에서 탈락해 아쉬움을 남겼다.
김호곤 축구사랑나눔재단 이사장은 “한마디로 감독으로서 거의 모든 장점을 갖추신 분이었다. 상대팀에 대한 분석이나 우리 팀의 전술, 선수들에 대한 배려 등 장점이 너무 많았다. 다만 그 시대 다른 지도자들에 비해서는 강한 이미지나 카리스마같은게 조금 부족했는데 그런 것은 성격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프로화의 가치를 선창한 선각자, 1989년의 뒤늦은 우승
앞서 1980년대는 ‘김정남의 시대’라고 했는데, 그것은 주로 국가대표팀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한 평가였다. 프로에서는 사정이 전혀 달랐다. 한국 프로축구는 1983년 시작한 수퍼리그를 역사적 기원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수퍼리그는 2개의 프로팀(할렐루야, 유공)과 3개의 아마팀(포철, 대우, 국민은행)이 참가한 과도기적인 리그였다. 당초 대한축구협회는 1982년까지의 실업축구 코리안리그 성적을 바탕으로 기존 팀을 1,2부리그로 나눠 1983년부터 승강제를 출범시킨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1982년 막을 올린 프로야구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축구도 프로화를 서둘러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그 와중에 서둘러 불안전한 형태로 출발하게 된 것이 ‘반(半)프로-반 아마’의 수퍼리그였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프로화를 두고 축구계 여론도 극심하게 대립했다. 프로화가 시기상조라는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승강제를 준비중인 코리안리그를 보다 활성화시켜서 내실을 다져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김정남은 프로화가 한국축구가 당연히 가야하는 미래라고 확신했다. 선각자다운 면모였다.
국내 프로축구 1호인 할렐루야에 이어 대한석유공사가 1982년 12월 17일 2호팀인 ‘유공 코끼리 축구단’의 창단식을 가졌다. 초대 감독에는 이종환, 코치에는 김정남이 선임됐다. 김정남을 영입하기 위한 노력은 그해 봄부터 시작됐다. 당시 김정남은 그해 11월에 열린 뉴델리 아시안게임 대표팀을 지도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프로의 유혹’이 먼저 다가온 것이다. 1982년 4월 26일자 동아일보 인터뷰를 보면 프로화에 대한 김정남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축구하는 사람들도 대우를 받을 때가 왔습니다. 야구나 농구는 우수 선수들이 대우를 받고 생활을 하는 판이지만 축구만은 그렇지 않아요. (프로화는)절대로 아무런 나쁜 영향이 미치지 않는다고 보고 있습니다. 선수들은 좋은 대우를 해줄 프로팀이 창단된다고 하니까 부쩍 생기를 내요. 대표선수때 좋은 기량을 보여야 프로로 이적할 때 좋은 조건을 내세울 수 있고 또 장래도 보장되니까요. (대표선수들의 프로팀 입단을)권장하고 있습니다. 후배 선수들에게 좋은 대우를 받으며 선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권장하는 것은 저의 도리라고 확신합니다.”
이종환 감독이 1985년 7월 성적 부진을 이유로 사퇴하면서 김정남 코치는 유공의 제2대 사령탑이 됐다. 하지만 국가대표팀과 유공의 사실상 겸임 체제는 서울올림픽까지 주기적으로 이어졌다. 1980년대는 국가대표팀 감독의 전임제가 확립되지 않았다. 월급은 소속팀에서 받으면서 대부분 일은 대표팀에서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런 불합리한 제도의 최대 피해자가 유공이었다. 김정남이라는 능력있는 지도자를 보유했기 때문이었다. 소속팀에 공헌하지 못하는 그의 마음도 편할 수가 없었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이 끝난 뒤 축구협회에서 그에게 아시안게임까지 맡기려고 하자 “유공을 1년반 이상 비웠고 앞으로 대표팀 감독은 유능한 지도자들이 교대로 맡아야 한다”며 고사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다시 지휘봉을 잡게 됐다. 1988년 올림픽을 앞두고도 비슷한 상황이 반복됐다.
‘축구협회가 사퇴한 박종환 감독 후임으로 김정남 감독을 차출키로 하자 유공팀은 불만을 표시했다. 유공팀 관계자는 “대표팀 감독에 공백만 생기면 김정남 감독을 들먹거린다”며 “김 감독은 85년과 86년 월드컵 예선과 본선을 치르느라 소속팀에 전념하지 못했으니 이번에는 다른 팀에서 국가대표팀 감독이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감독은 “유공이 아직 한번도 프로리그에서 우승을 못한 것은 감독인 내가 대표팀에 묶여 팀에 소홀했던 때문”이라며 내정을 받아들이지 않을 뜻을 비쳤다.’(동아일보 1988년 7월 4일자)
하지만 결국 구단은 ‘올림픽이라는 국가적 중대사에 팀의 손해를 감수하겠다’며 차출에 응하게 된다. 서울 올림픽은 김 감독의 국가대표팀 마지막 무대가 됐고, 그는 1989시즌을 비로소 동계훈련부터 온 힘을 다해서 준비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뒤늦은 첫 우승을 차지한다. 이는 유공이 부천SK를 거쳐 제주 유나이티드로 이어지는 40년 동안 아직도 유일한 우승컵으로 남아있다.
시즌 초반 대우가 선두로 나섰지만 중반 이후 럭키금성과 유공의 각축전으로 변했다. 유공은 선두 럭키금성과 38라운드에서 벌어진 사실상의 결승전에서 2-1로 승리하며 1위에 올라섰고 이후 최종전에서 난적 포철을 3-2로 제압v하면서 감격의 첫 우승을 차지했다. 김정남 감독은 “그동안 적극적으로 뒷바라지를 해준 구단에게 영광을 돌린다”며 오랜 기간 마음의 짐을 마침내 내려놓았다.
‘김정남 감독은 혹독한 동계훈련을 통해 선수단의 체력을 끌어올렸다. 패배감에 젖어있는 선수들의 자신감 회복이 우선이었다. 선수단 운영에도 노련미를 보였다. 핵심 선수들의 국가대표팀 차출로 고비가 찾아왔을 때는 후보 선수들을 활용하고 일부 선수들의 포지션을 변경하는 등 변칙적인 전술로 나섰다. 최종 수비수인 조윤환에게 리베로 역할을 부여해 노수진에게 다양한 볼 배급을 하도록 주문했다. 노수진은 팀내 최다인 16골을 기록하며 김정남 감독의 전술에 부응했다. 주장 조윤환도 5골 6도움으로 공수에서 만점 활약을 펼쳤다.’ (한국프로축구연맹 간행, ‘한국프로축구 30년’, p.106)
16골 7도움으로 최우수선수에 뽑힌 노수진 대한축구협회 이사는 “감독님은 당시 자율적으로 팀을 운영했다. 선수단을 억압하지 않으면서도 무언가 단합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시즌 중반과 막판에 위기가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전혀 내색하지 않으면서 차분하게 팀 분위기를 이끌었다. 그래서 선수들에게 불안감이 퍼지는 일이 별로 없었다. 평상시에도 큰 상황만 정리했고 나머지는 코치들에게 맡겼다. 선수들도 전적으로 신뢰했다. 사사건건 간여하지 않으면서 선이 굵게 팀을 운영했다”고 기억했다.
악동 이천수도 순치시켰던 울산 현대 시절, 자율 축구가 빛났다
노수진의 회고에서 알 수 있듯이 김정남 감독은 ‘자율 축구’를 추구했다. 부드럽고 유연한 그의 성격과도 부합되는 축구 철학이었다. 그의 자율 축구가 다시 한번 빛을 발한 것은 울산 현대 시절이었다. 그는 고재욱 감독 후임으로 2000년 8월 22일 울산 제6대 감독으로 취임해 2008년 시즌 말까지 재임했다. 풀 시즌은 치른 것은 2001년부터 2008년까지 여덟 번이었다. 이 기간 동안 정규리그 우승 1회(2005년)와 컵대회 우승 1회(2007년)를 차지했다. 또 정규리그에서 2002년과 2003년 2년 연속 준우승을 했다. 이때 울산을 제압한 팀이 당시 3연패를 달성했던 최강 성남 일화였다. 울산 호랑이에게 오랜 기간 지워지지 않았던 ‘2인자’ 이미지가 이때부터 형성됐다고 볼 수도 있다. 성남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해서 단일리그에서 다시 플레이오프(PO) 제도가 도입됐다. 전후기 우승팀과 통합 승률 1,2위팀이 4강 PO를 치르는 방식이었다. 이때 울산은 2004년 전,후기리그에서 모두 3위, 2005년에도 전,후기리그에서 또다시 3위에 그쳤다. 김정남 축구가 다소 수비적이고 재미가 없다는 일각의 비판이 형성된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그나마 2005년 시즌에 4강 PO의 막차를 탄 뒤 뒷심을 발휘해 역전 우승 드라마를 연출해냈다. 그 주역은 ‘악동’ 이천수였다.
김 감독은 고려대 후배이기도 한 그를 재학중에 스카우트했다. 2002년 데뷔 시즌 신인왕을 탄 이천수는 스페인의 레알 소시에다드에 이적했다가 적응 실패로 K리그에 복귀했다. 2005시즌 중반이었다. 그해 전기는 부산, 후기는 성남이 우승했다. 통합승률 1위는 인천이었고, 울산은 통합 2위로 간신히 4강 PO의 끄트머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시즌 중반 돌아와서 한창 기세가 올라있던 이천수가 있었다. 성남에게 2-1 역전승을 거두고 인천과 가진 챔피언결정전 1차전에서 이천수는 해트트릭을 폭발시키며 5-1 승리를 이끌었다. 2차전에서 1-2로 졌지만 종합 스코어 6-3으로 울산은 1996년 이후 9년만에 두 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리그 복귀후 14경기 출전에 7골 5도움을 기록한 이천수는 최우수선수로 뽑혔다.
2003년 7월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에 진출했던 이천수가 현지 적응에 실패하고 친정팀 울산에 돌아올 때만 해도 그를 향한 시선은 회의적이었다. 프로데뷔후 줄곧 상종가를 치던 이천수의 축구 경력에 제동이 걸렸고, 경기 감각이 떨어진 그가 얼마나 제 기능을 할 수 있겠느냐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이천수는 특유의 승부 근성을 발휘해 반전에 성공했다. (중략)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이천수는 축구보다 축구 외적인 문제로 구설에 오르는 일이 많았다. 2006년 정점을 찍은 이천수의 축구 경력은 이후 잦은 이적과 부상, 슬럼프로 어지러운 발자국을 남겼다. 두 번째 유럽 진출이었던 네덜란드에서는 향수병으로 방출당하다시피했고, 그를 받아준 국내팀 수원에서도 팀내 불화를 일으키면서 무적 신세가 됐다. 이후 전남은 이천수의 임의탈퇴를 공시했고 여론도 등을 돌렸다. (배진경 저, ‘K리그 레전드’, p.244~247 발췌 인용)
이천수는 악동으로 유명했다. 대부분 지도자들이 그를 제어하지 못했다. 국내에서도 그랬고, 국외에서도 그랬다. 이천수의 재능을 십분 활용한 것은 대표팀의 히딩크, 울산의 김정남 정도였다. 한마디로 프로에서 이천수가 팀내 주어진 역할을 제대로 해내면서 재능을 만개했던 것은 울산 시절이 거의 유일하다. 이것이 과연 우연일까. 울산에는 김정남이라는 덕장이 있었다. 그는 선수를 품을 줄 알았고, 그들의 재능을 활용할 줄 알았다. 확언하건대 가장 중요한 명장의 조건이다.
“선수들하고 어떤 융화하고, 서로 소통하는 부분도 보편적으로 이렇게 자유롭게 놔두는 편이거든요. 예를 들어 이천수 같은 선수, 그 선수도 좀 자유분방한 선수거든요. 관리하기가 쉽지 않은 선수예요. 그런데 그 선수하고 잘, 좌우간 내가 양보할 건 양보하고, 또 내가 누룰 건 눌러 가면서 서로 이렇게 감독하고 선수하고 힘겨루기를 하면서 같이 잘 갔다. 이렇게 얘기를 하거든요. 많은 분들은 제가 천수 관리를 잘했다 그러는데, 그런 건 아니고, 서로 좀 존중한다 그럴까. 서로의 입장을, 천수도 내 입장에 대해서, 감독 입장에 대해서 ‘자기가 감독을 위해서 자기가 열심히 해야 한다’하는 그런 거를 늘 보여줬고, 또 나는 천수한테 ‘야, 너만 믿는다’ 뭐 이렇게 해가지고 둘이서 그런 좋은 관계로 좋은 결과를 가져왔고.” (국민체육진흥공단 간행, ‘2017 스포츠발전 공헌자 구술자료집’, p.104)
2005년 울산에서 김정남의 ‘자율 축구’는 다시한번 꽃을 피웠고 그는 프로에서 두 번째 챔피언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우승 멤버인 현영민 울산 현대 U-18 감독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김정남 감독은 자율 속에서 책임을 강조했다. 아주 디테일한 전술적인 설명보다는 선수들이 그라운드에서 자신감있는 플레이를 펼칠 수 있게, 자신이 가진 기량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만들어줬다.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좀 편안하게 경기를 치를 수 있게 그런 분위기적인 측면을 많이 만들어줬다. 선수들은 서로 눈치 보지 않으면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했다. 그렇기에 막판에 어려운 상황을 스스로 극복할 수 있었다.’ (현영민 네이버 컬럼 22년 10월 20일, ‘2005년-2022년 호랑이는 어떻게 다른가’에서 인용)
그 당시 울산에는 이천수 현영민 이호 김정우 등 젊은 재능들이 많았다. 이들은 억압받지 않은 자유로운 팀 풍토에서 창의적인 플레이를 펼칠 수 있었다. 이런 팀 분위기를 만든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김정남 감독의 품성에서 우려나온 자율적인 분위기에서 이들의 재능이 만개하면서 울산에 극적인 역전 우승을 안겨줄 수 있었다. 이후 울산이 홍명보 감독의 지휘로 2022년 세 번째 우승을 차지하기까지는 무려 17년의 긴 세월이 필요했다.
사족: 영원한 라이벌 김호와의 숙명적 관계
김정남 감독의 축구 인생을 논할 때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숙명의 라이벌 김호 감독이다. 나이는 김정남 감독이 한 살 위였지만 이들은 선수로, 지도자로 운명같은 경쟁 관계를 평생 이어갔다. 신사 김정남이 항상 축구계의 주류에 있었다면, 반골 기질의 김호는 내내 비주류를 자처했기에 이들의 축구 인생은 더욱 대조적일 수밖에 없었다. 아시아 최고의 수비 듀오로 평가받던 김정남-김호 조합이 본격 가동된 것은 1966년부터 였다. 이후 지도자로의 경쟁도 불꽃을 튀겨 통산 200승 선착 경쟁, 통산 최다승 경쟁 등이 팬들의 관심을 끌었다.
“둘이 호흡을 맞추면서 아시아 최강 수비라는 칭호도 받았고 우승도 많이 했어요. 물론 김호와 저는 성격 면에서는 많이 달랐습니다. 선수 때야 지도자의 요구 사항에 충실히 따르는 것이 기본이었기 때문에 별로 다를 것이 없었지만 지도자가 된 후에는 각자의 색깔이 묻어나오기 시작하니까 달라졌죠. 제가 조용한 스타일이었다면 김호는 좀 더 직선적이고 강한 면이 있었어요. 각자의 길이 조금씩 달랐고 스타일도 차이가 있었지만 어쨌든 우리는 친했고 좋은 콤비였습니다.”(대한축구협회 홈페이지, ‘나의 선수시절’ 인터뷰, 2010년 11월)
그 경쟁이 명예의 전당 지도자 부문 첫 헌액자를 선출하는 자리까지 이어진 것은 정말 운명적이었다. 선정위원들 사이에서도 정말 치열한 난상 토론이 벌어졌다. 두 분을 동시에 헌액하자는 의견까지 나올 정도였지만, 규정상 그럴 수는 없었다. 첫 헌액자는 김정남 감독이 됐지만 어쩔 수 없이 선후만을 가린 측면이 강하다. 두 분 모두 헌액 대상자로 손색없는 업적을 남겼다. 두 분의 치열한 경쟁이 그 오랜 시간 동안 한국축구를 몇 단계 더 발전시키는데 전례를 찾기 힘든 에너지가 됐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