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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최종덕 – 1970년대 중거리 슛의 명수. 2022년 7월 21일 사망
K3 발전을 위해 노력, 축구 대학 설립을 하려 노력했으나 상처만 입은 축구인
예산FC 단장으로 재직하던 무렵의 최종덕
최종덕은 1970년대 중후반 우리 국가대표팀의 오른쪽 풀백으로 맹활약했던 선수다. 당시만해도 큰 키였던 177cm의 당당한 체구와, 한껏 멋을 낸 장발이 매력적이었던 이 미남 스타는 장기인 강력한 중거리 슛으로 많은 갈채를 받았다.
그랬던 그가 안타깝게도 지난해 여름(2022년 7월 20일) 세상을 떠난 사실이 알려졌다. 향년 68세. 2010년 내셔널리그 예산FC 단장을 끝으로 축구계와 연락을 끊고 고향인 충남 서산에서 오랫동안 은둔 생활을 한 탓에, 동료나 선후배들도 그의 사망 소식을 접한 사람이 많지 않았다.
아래 인터뷰 기사는 지난 2005년 대한축구협회에 홈페이지에 실린 것이다. 몇 년 전 협회 홈페이지를 개편할 때 2006년 이전 기사는 부득이 삭제하는 바람에 해당 인터뷰는 인터넷으로 검색하기도 어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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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월드컵 본선 진출은 축구팬들에게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질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1985년 잠실벌에서 허정무의 결승골로 일본을 누르고 1986 멕시코 월드컵 진출을 결정짓기 전까지만 해도 월드컵은 잡을만하면 우리의 눈앞에서 사라지는 신기루와 같은 존재였다.
비록 월드컵에 진출하지는 못했지만 1970년대 한국 축구는 그 어떤 시기보다 출중한 기량의 선수들이 끊임없이 배출됐다. 축구장은 언제나 활력이 넘쳤고, 고등학교 경기일지라도 관중석이 가득찰 정도로 팬들의 열기는 뜨거웠다.
그 한국축구 중흥기의 한 가운데에 ‘중거리 슛의 명수’ 최종덕이 있었다. A매치를 98경기나 뛰었던 화려한 선수 생활 이후 프로팀 유공(현 제주 유나이티드) 코치와 방송 해설자를 거쳐, 내셔널리그 최초의 시민구단인 서산 축구단의 감독으로 일하기도 했다. 이제는 옛 얼굴을 알아보기 힘든 중년 남성의 모습이지만, 축구에 대한 철학과 의지를 밝힐 때만큼은 스타의 힘과 품위가 느껴졌다.
지금도 한국축구에는 많은 스타들이 탄생되고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하지만 시간을 거슬러 갈수록 오늘날의 한국 축구를 만든 과거의 명선수들은 올드 팬들의 전유물로만 남겨지는 것 같아 아쉬움이 있다. 비록 월드컵에 진출하지는 못했지만 한국축구의 가장 찬란한 도전기 중 하나로 남을 1970년대 축구를 젊은 팬들과 공유하고, 나이든 팬들은 그 추억을 되새겼으면 하는 바람으로 최종덕과 인터뷰를 하게 됐다.

1975년 대표팀에 첫 발탁되던 시절 모습
– 뵙게 되어 영광이다. 최종덕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은 역시 1977년 서울 동대문운동장에서 있었던 아르헨티나 월드컵 예선 이스라엘 전에서 3-1로 이길 때 터뜨린 중거리 슛 골이다. 그 순간은 올드 팬이라면 누구나 기억하고 있다.
월드컵과 같은 중요한 대회를 앞두고 항상 이스라엘에게 막혀 좌절했던 것이 1970년대 한국축구였다. 사실 텔아비브에서 먼저 벌어졌던 원정 경기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김진국 선배의 득점이 오심으로 인정되지 않으면서 0-0 무승부로 경기가 끝났다. 당시 오완건 단장님이 격렬히 항의도 했지만 번복되지 않았다.
때문에 선수들 사이에서 홈 경기에서는 꼭 이스라엘을 잡고 월드컵에 진출하자는 의지가 강했다. 2-1로 앞선 상황에서 후반전이 끝날 무렵, 아크 서클 뒷쪽에서 차범근 선배가 오른쪽에 있던 나에게 공을 밀어주었다. 한번 툭 치고 나가 오른발 아웃 프론트로 감아 찼다. 발에 감기는 느낌이 좋았다. 거리가 40미터 가까웠는데 반대편 골 모서리에 그대로 꽂혔다. 운동장을 가득 채웠던 3만 관중의 함성 소리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 홍명보 울산현대 감독이 9살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와 함께 이 경기를 운동장에서 직접 보고난 뒤 축구 선수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훗날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 편집자)
– 비단 그 골뿐만 아니라 많은 경기에서 중거리 슛으로 득점을 기록해 ‘중거리 슛의 명수’란 별명이 붙었는데, 원래 학창 시절부터 킥이 강했나?
어릴 때는 몸이 작고 힘이 약해서 킥이 잘 안됐다. 그래서 여러가지 방법으로 킥 실력을 키우기 위한 연습을 했다. 그 중 하나가 공을 물에 불려서 무겁게 한 상태로 때리는 방법이었다. 또 골대 모서리 양쪽에 깡통을 달아놓고 슛을 연습하기도 했다. 정확하게 맞추면 소리가 나기 때문에 어두워져도 연습할 수 있었다. 결국은 연습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 예전에 백승철 선수(포항스틸러스) 인터뷰를 보면 슈팅을 끊어 차는 게 슈팅을 강하게 하는 자신의 요령이라고 밝혔다. 강슛을 할 수 있었던 특별한 요령을 갖고 있었는지 궁금하다.
물론 각자 자신만의 방법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반복된 훈련을 통해 감각을 확실하게 익혔다. 이렇게 찰 때와 저렇게 찰 때, 여러 상황에서 어떻게 차는 것이 가장 강력하고 정확하게 간다는 것을 몸으로 익혔다. 시합에서 그런 감각이 정확하게 느껴지면 여지없이 골이었다.
– 최종덕 이후에도 많은 캐논 슈터가 있었다. 황보관, 이기형, 노상래, 백승철, 김진규 등. 누가 자신에 가장 버금가는 선수라고 생각하나?
지금과 당시는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비교하기 힘들다. 열거된 선수들 모두 뛰어난 선수들이다. 다만 지금까지 한국축구를 보면 여러 공격 옵션 중 강력한 중거리 슛이나 프리킥이 부족했는데, 더 많은 선수들이 그런 점을 염두하고 슈팅 능력을 갈고 닦았으면 한다.
– 처음 축구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으셨나?
고향인 충남 서산의 해미라는 지역이 면 단위인데도 축구가 굉장히 활성화되어 있는 고장이었다. 그래서 과거부터 많은 축구선수들이 배출됐고, 그런 영향으로 자연스레 축구에 빠져들었다.
해미 중학교에 입학해서 당시 대구에서 벌어진 학도 체육대회에 서산 대표로 출전했었다. 그 대회에서 우리 팀이 3위에 입상했는데, 경기를 관전하던 서울 중앙중학교의 감독님이 축구할 의향이 없느냐고 제안하셨다. 지금으로 따지면 일종의 스카웃이었던 셈이다.
– 예전의 신문 기사들을 찾아보면 축구를 하기 위해 가출했다고 되어 있던데?
원래 공부를 좀 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부모님은 내가 운동보다는 공부를 하길 바라셨다. 하지만 나는 정말 축구를 하고 싶었다. 결국은 집을 나왔고, 서울에 올라와서 중앙중학교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운동을 시작했다. 중앙중을 거쳐 중앙고로 진학했다.
– 과거 중앙고에는 축구부가 없었던 걸로 안다.
원래는 축구부가 있었는데 일제 시대 때 활동이 중단됐다. 그러다가 내가 들어가기 5년 전에 선배들이 축구 붐을 일으키면서 팀이 다시 운영되기 시작했다. 내가 뛰던 당시에는 여러 대회 결승에서 대신고와 자웅을 겨뤘을 정도로 좋은 성적을 거뒀다. 내 뒤로 중앙고 후배 중에 유명한 선수로는 정해성, 김주성이 있다.
– 대표선수로 활약하던 1970년대 중후반에는 김호곤, 조영증, 박성화 등 어느 때보다 많은 명수비수가 배출되었다. 학창 시절부터 수비수로 활약하셨던 건가?
중·고교 시절에는 주로 링커(미드필더)였다. 패스 능력이 나름대로 괜찮았던지 감독님이 중앙 링커 역할을 맡긴 것이다. 하지만 대학때부터는 대부분 센터백과 풀백으로 뛰었다.
– 1973년 이란에서 열린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대회 멤버로 발탁되며 팬들에게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당시 청소년 대표팀은 연습 경기에서 A대표팀을 누를 정도로 강한 전력을 자랑했다고 하던데?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나는 주로 벤치 멤버로 있었는데 주전 선수들의 면면이 뛰어났다. 포워드 라인에는 허정무와 박종원, 미드필더에는 이영무, 박병철이 있었다. 지금은 팬들에게 잊혀졌지만 송병덕이나 골키퍼 윤종범도 매우 뛰어난 선수였다. 이듬해인 1974년 태국 방콕에서 열린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에는 주전으로 출전했다. 당시에는 청소년 선수권이 1년마다 열렸는데 그 대회에서 두각을 내면 자연스럽게 국가대표팀에도 뽑혔다. 일종의 엘리트 코스라 할 수 있다.

고려대 수비수로 한양대와의 경기에서 볼을 트래핑하는 최종덕(가운데 줄무늬 유니폼)
– 고려대 74학번으로 입학하셨는데, 대학 축구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고려대와 연세대 74학번들이 화려한 선수 구성을 자랑했다. 고대에는 최종덕, 박성화 등 수비수들이, 연대에는 허정무, 조광래, 박종원 등 공격 쪽에 재능이 뛰어난 선수들이 몰렸다. 당시 두 학교 정기전을 회상한다면?
축구는 양교 대항전의 맨 마지막에 치러지는 정기전의 꽃이었다. 그 경기에서 지면 모든 경기에서 진거나 마찬가지라고 다들 생각했기 때문에 어느 종목보다 정신적인 측면에서 무장하고 나갔었다. 그 무렵 두 학교의 정기전은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양교 사람들만의 관심사가 아닌 모든 축구팬들의 관심사였다.
– 차범근 선수가 1979년에 서독 분데스리가 진출할 당시 고려대와 연세대 양교 출신의 현역과 OB들이 총출동해 동대문운동장에서 환송경기를 했다고 들었다.
1979년 6월에 차범근 선배가 공군 제대하면서 분데스리가에 뛰게 됐다. 두 학교의 선후배들이 그 동안의 경쟁심과 라이벌 의식을 잊고 그날만은 차범근 선수를 위한 경기를 갖자고 의기투합했다. 박성화가 해트트릭을 하면서 우리가 이겼다(웃음).
– 당시 국가대표팀은 1진 화랑과 2진 충무로 나뉘어져 운영된 것으로 알고 있다. 1진 화랑 팀에는 언제 발탁되었나?
1975년 초, 그러니까 대학 2학년 때다. 그 이후로는 계속 화랑에 있었고 1981년 대표팀에서 은퇴할 때까지 2진 충무로는 한번도 내려가지 않았다. 1976년에는 올해의 선수상을 받기도 했다.
– 많은 팬들의 회상에 따르면 당시 라이트 윙이었던 차범근과 호흡이 잘 맞았다고 하던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는지?
우선 대학과 대표팀에서 오랫동안 함께 생활했던 게 가장 큰 이유일 테다. 잘 알다시피 차범근 선배는 발이 빨랐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빈 공간에 치고 들어가는 능력이 탁월했다. 나는 정확한 킥이 장점이었기 때문에 움직여 들어가는 차범근 선배의 앞에다 떨어뜨려 주는 패스를 넣어주었다. 그런 공격이 당시 대표팀의 주요 공격루트였다. 차범근 선배와도 평소 서로 이야기를 많이 하다 보니 호흡이 좋았던 것 같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아시아 예선 경기에 나선 선수들. 왼쪽부터 박성화, 박병철, 최종덕, 허정무.
– 사실 그 무렵에는 측면 수비수들에게 오버래핑이라는 개념이 잡혀있지 않았다고 들었다. 그럼에도 당시로선 드물게 공격에 가담하는 수비수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때만 해도 수비수가 공격 가담을 한다는 생각이 미흡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내가 측면을 돌아들어가 어시스트를 하고, 골도 기록하고 하면서 인식에 변화가 생겼고, 대표팀의 수비전술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던 것 같다.
비슷한 시기에 분데스리가 함부르크 SV의 오른쪽 풀백인 만프레드 칼츠라는 선수가 오버래핑을 많이 시도했다. 당시 TV에서 해주던 분데스리가 녹화중계를 보면서 그 영향을 많이 받았다. 어떻게 하면 선진 축구의 플레이를 활용해 볼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었다.
– 현역 시절 미남 스타로 유명하셨다. 여성 팬들도 많았을 것 같은데?
많았다.(웃음) 하지만 그때는 합숙 훈련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지금처럼 팬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나 시간적 여유가 적었다. 대표팀에 한번 발탁되면 1년 내내 태릉선수촌에서 지내야 했을 정도였다.
– 조용한 성격에 매너도 상당히 좋으셨던 걸로 안다. 과격한 움직임을 취하지 않은 것은 물론 상대의 도발에도 흥분하지 않았다고 들었다.
지금도 선수들에게 강조하는 것이 이성을 가지고 경기에 임해야지, 흥분해서는 자신의 실력을 절반도 발휘할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다. 주심에게 심하게 항의한다든지 상대 선수들에게 과격한 행동을 보이는 것은 일절 금하고 있다.
축구에서 억울한 상황은 누구에게나 발생한다. 그것을 행동이나 반발로 어필하려 하기보다는 축구로, 실력으로 보여주라고 한다. 그것이 내가 생각했던 축구의 중요한 밑바탕이었고, 지금도 변함이 없다.
– 대표선수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앞서 말한 1977년 이스라엘과의 경기였나?
아무래도 그렇다. 이스라엘과의 경기는 워낙 유명하지만 그해 가을에 열렸던 쿠웨이트전도 기억에 많이 남는다. 월드컵 최종예선이었는데, 전반에 선취골을 넣어서 1-0으로 앞서 있었다. 하지만 후반 시작하자마자 동점골을 내주었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주장이었던 김호곤 선배가 억울하게 퇴장을 당했다. 어웨이 경기라 굉장히 힘들었다. 한 골을 더 내줘 2-1로 우리가 지고 있는 상황에서 경기 종료가 가까워졌다. 아크 서클 부근에서 프리킥을 얻었다. 그것을 내가 직접 슛으로 연결해 동점골을 넣어서 무승부를 만들었던게 기억난다.

1977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아르헨티나 월드컵 아시아 예선 일본전에서 상대 공격을 저지하고 있다.(왼쪽 선수)
– 1981년에 스페인 월드컵 본선 진출이 좌절되고 대표팀에서 은퇴를 하셨다. 27살이면 지금 기준으로는 한창 전성기의 나이인데 왜 빨리 대표팀을 떠났나? 월드컵 탈락으로 대표팀에 대한 회의가 들었던 것인지.
그런 건 전혀 없었다. 물러 날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당시는 대표팀에서 선수가 한번 자리를 잡으면 7~8년씩 주전으로 뛰는 분위기여서 자연스러운 세대교체가 이뤄지기 힘들었다. 내가 오랫동안 대표팀에서 뛰는 것은 분명 큰 영광이다. 하지만 박경훈을 비롯한 좋은 후배 선수들이 오른쪽 풀백으로 등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서라도 내가 물러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 최근(인터뷰했던 2005년) 박주영에 대한 팬과 언론의 관심이 엄청나다. 현재 박주영은 과거 공격수들과 비교했을 때 누구와 스타일이 비슷한가? 어떤 분들은 차범근에, 또 어떤 분들은 이태호, 최순호에 비교하기도 한다.
선수마다 나름대로 장점이 있다. 넓은 지역에서는 발군의 스피드를 살린 차범근이 돋보였고, 이태호는 좁은 공간에서의 플레이가 탁월했다. 최순호는 장신이면서도 기술이나 볼 센스가 아주 뛰어났고.
박주영은 이전 선배들이 갖고 있던 장점을 겸비한 선수가 아닌가 싶다. 스피드와 기술이 모두 뛰어나면서도 득점력이 상당히 높다. 순간적으로 탁 튀어나오는 모습과 찬스가 생기면 반드시 골로 연결한다는 점에서 많은 기대를 걸면서 보고 있다. 한국에서 상당히 보기 드문 선수다. 앞으로도 계속 보호해주며 관리를 해줘야 한다.
– 타고난 성품 때문에 적이 없으신 걸로도 유명한데, 가장 친했던 축구인은 누구인가?
비록 연세대를 나오긴 했지만 허정무가 가장 편한 친구다. 청소년 대표팀 시절부터 계속 생활하며 티격태격한 단짝이었다. 재미있는 건 허정무 감독이 레프트 윙과 센터포워드를 보다 보니 학창 시절부터 가장 많이 부딪혔던 선수였다는 것이다. 서로 가장 어려워했던 상대이기도 했다.(웃음)
– 대표팀에서 물러난 후 홍콩으로 건너가 세미프로팀인 해봉 팀에 입단을 하셨는데, 어떤 계기로 홍콩에 간건가?
당시 홍콩 해봉 팀 관계자들이 한국에 와서 내가 경기를 하는 것을 보고 자기네 팀에서 뛸수 없겠냐고 제의를 했다. 새로운 경험을 쌓고 싶다는 생각도 들어 입단했다. 당시 대표팀에서 미드필더를 봤던 김강남, 김성남 쌍둥이 형제와 함께 나갔었다.

1985년 럭키금성 소속으로 프로축구 우승을 이끌었다. 맨 오른쪽이 최종덕, 그 옆은 박항서.
– 1983년 슈퍼리그 출범 때 할렐루야에 입단했다. 당시 홍콩에 갔다가 1년여만에 돌아온 이유가 뭔지 궁금하다.
대표팀에서 나를 지도했던 함흥철 감독님이 그때 할렐루야의 감독을 맡고 계셨다. 그런데 감독님과 기존 선수들 간에 갈등이 생겨 5명의 선수가 팀을 이탈했고 팀이 와해될 상황에 처했다. 그런 일이 있으니까 함흥철 감독님이 직접 홍콩까지 오셔서 사제간의 정을 생각해서 도와줄 수 없겠냐고 간절히 부탁하셨다. 일종의 의리 때문이랄까? 큰 고민을 하지 않았고 곧바로 할렐루야 팀에 들어갔다.
– 슈퍼리그 원년 우승을 차지한 팀은 할렐루야였다. 당시 할렐루야 수비진은 대표팀 레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 5개 참가팀 중에서 같은 프로팀이었던 유공과의 경기가 제일 흥미로웠다고 들었다.
할렐루야 수비수 대부분이 대표 선수 출신이었다. 나와 박성화, 홍성호, 그리고 충무 팀에서 활약했던 황정연 선수까지. 다른 팀으로선 불평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나는 오른쪽 풀백을 보면서 상황에 따라 중앙도 봤었다.
유공의 왼쪽 윙이 김석원 선수였는데 포지션상 나와 자주 부딪혔다. 김석원은 스피드 있는 드리블이 탁월해서 나중에 대표팀에서도 활약을 했다. 하지만 무릎 부상으로 큰 빛을 보지 못한 안타까운 선수다.
내가 중앙고 시절에 감독님이었던 김찬기 선생님이 초등학교 선수 한명을 합숙소에 데려온 적 있었는데, 그 아이가 감독님 아들인 김석원이었다. 어렸을 때는 내가 같이 공도 차면서 이것저것 가르쳐주고, 훈련 뒤에 몸도 씻겨주고 옷도 갈아입혀줬다. 그런데 몇년 뒤에 프로에서 나와 맞붙는 상대가 되어 있었다. 그런 사정을 아는 분들은 둘이서 그렇게 뛰는 것을 보며 재미있어 하기도 했다.(웃음)
– 첫해 우승 후 럭키금성(지금의 FC서울)으로 이적을 해서도 1985년에 프로축구 우승을 경험했다. 당시 기억을 회상해 주신다면?
경북 구미에서 대우와 했던 경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당시 승점 차가 없는 공동 선두였는데, 김풍주 골키퍼를 상대로 중거리 슛을 성공시켰다. 그것이 결승골이 되어서 우리 팀이 우승을 하게 됐다. 프로선수로 생활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였고, 골이었다.
그때는 프로축구가 홈 앤드 어웨이로 경기를 치르지 않고, 전 구단이 유랑극단마냥 전국 각지를 옮겨다니며 경기를 했다. 평소 축구를 보기 힘든 도시나 축구 인기가 높은 도시들을 찾아다녔고 자연스레 관중들의 수는 많았다. 심지어는 관중이 너무 많아서 그라운드 안까지 밀려들어와 경기를 제때 시작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럭키금성에서 우승을 하고는 선수로서 완전히 은퇴를 했다. 팀에서 1년만 더 뛰어달라고 요청했었는데, 이미 유공에서 코치를 시작하기로 내정됐던 상태라 결심을 되돌릴 수 없었다.
– 선수로서 아쉬움이 남는다면 무엇인가? 역시 월드컵과 올림픽 본선에 진출 못한 것인가?
그렇다. 월드컵 예선 두번, 올림픽 예선을 두번 치르면서 한번쯤은 본선에 나갔으면 좋았을텐데, 무척 아쉽다. 그런 점에서 2002년 월드컵을 정말 기쁘게 지켜봤다. 대한축구협회를 비롯한 국민적인 지원이 있었고, 홈에서 치러졌기 때문에 악조건이 적었다. 선수들 모두 최선을 다했고.

선수 은퇴후 프로축구 유공 코끼리의 코치로 김정남 감독(왼쪽)을 보좌했다.
– 유공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해서 꽤 오랫동안 코치 생활을 하셨다.
8년 동안 코치로 일했다. 당시 유공의 감독이셨던 김정남 감독님은 선수시절부터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신 분이다. 밖으로 표현은 잘 하지 않지만 내적으로는 많은 것을 갖추신 분이다. 지도자로서도 많은 것을 배웠었다. 김정남 감독님이 유공을 떠날때 나 역시 미련을 갖지 않고 떠났다.
– 내셔널리그 서산시민 축구단의 창단 과정부터 깊이 참여하신 걸로 안다.
처음부터 구단운영에서부터 마케팅까지 모든 걸 내가 관여했다. 재정 확보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 운영을 하다 보니 어려움이 많다. 팬들과 연고지 시민들, 기업들이 참여하는 컨소시엄 형태가 앞으로 우리나라 구단들이 갖춰야 할 바람직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 지도자가 갖춰야 할 가장 우선적인 역량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우리 지도자들이 잘하고 있지만, 가장 부탁하고 싶은 것은 제자들에게 인격적으로 존경받는 지도자가 되어 달라는 점이다. 자신이 이론과 실기를 갖추지 않으면 지도하는 과정에서 강압적인 모습이 나오게 된다. 이론으로 이해시킬 수 있고, 실기로 보여줄 수 있는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 많은 축구인과 팬들이 화려한 무대에서 활약하는 지도자 최종덕을 보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일텐데, 각급 대표팀이나 K리그 감독 욕심은 없는가?
개인적인 명예를 생각한다면야 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급한 것이 있다. 바로 매년 1천여명의 고등학교 졸업자, 대학을 졸업하는 5백여명의 선수들이 갈 곳이 없어 축구를 접어야하는 지금의 상황을 타개하는 것일 테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성인 무대에 더 많은 팀이 생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