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0~70년대 아시아 최고 수비수로 활약, 큰 족적 남겨
최초 대표 팀 전임감독으로 1994년 미국월드컵서 한국축구 각인
K-리그 541경기 최다 지도, 한 시즌 전관왕․통산 207승 달성,
고향사랑 각별, 통영 유소년축구클럽 총감독으로 후진 양성하기도
“시설, 기술, 행정 두루 선진화 돼야 세계 축구 수준 성장”
“통영 훌륭한 체육인 많이 배출, 체육회관 설립 힘 모아야”

통영은 축구의 도시이자 대한민국 유명 축구스타들의 산실이다. 1959년 최귀인 선수가 통영출신 최초로 태극마크를 달고 국제경기에 출전한 이후 김호, 박무웅, 손태호, 김호곤, 고재욱, 서정래, 김홍주, 김종부, 김도훈, 김민재 등 걸출한 국가대표선수들이 배출되었다. 이들 중에는 선수생활을 마치고 지도자로서 명성을 날리기도 했으며, 김호 선수는 대한민국 제1호 국가대표 전임감독과 프로축구단 감독 등을 지내며 한국축구계의 ‘큰 산’이자 ‘살아 있는 전설’이 되었다.
1944년 통영시 도천동에서 태어난 김호 전 감독은 어릴 적부터 달리기를 잘하고 운동소질이 뛰어나 주위의 주목을 받았다. 두룡국민(초등)학교 시절 처음에는 육상선수로 뛰었으나 우리나라 축구국가대표팀이 국제대회 결승에서 홍콩세미프로 선수들이 주축이 된 자유중국(대만)에 패하는 라디오 중계방송을 듣고서는 ‘축구 국가대표선수가 되겠다’는 포부를 갖고 축구부에 들어가 두각을 나타냈다.
통영중학교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던 김 감독은 통영고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학년 때 축구부가 없어지자 실의와 무기력에 빠져 축구를 접고 1년을 쉬었다. 그러나 그의 재능을 아까워 한 주위의 권유와 채근으로 진주고등학교에 입학했다가 우여곡절 끝에 다시 동래고등학교로 옮겼다
수비수임에도 빠른 발을 지녔던 김 감독은 동래고 시절 당시 안종수 감독의 지도를 받으며 기량이 일취월장 했으며 졸업 후 안 감독이 자리를 옮겨 지휘봉을 잡은 제일모직에 입단했다. 이후 해병대 축구단과 양지(중앙정보부: 지금의 국가정보원)팀에서 활약하다가 1969년부터 1974년까지 상업은행 선수로 뛰었으며, 1975년 포항제철 축구단에서 1년을 보낸 뒤 현역에서 은퇴했다.
김 감독은 1965년 한․중․일 친선경기에 처음으로 국가대표로 뽑힌 뒤 1960~70년대 8년 간 국가대표 붙박이 수비수로 활약하며 아시아 최고 수비수라는 찬사를 받았다.
현역에서 은퇴한 후 김 감독은 1977년부터 모교인 동래고등학교를 시작으로 1979년 세계청소년대회 코치, 1982~1987년 한일은행 축구단 감독, 1988~1991년 현대축구단 감독 등을 거치며 능력과 지도력을 인정받아 1992년부터 1994년까지 대한민국 축구사상 처음으로 계약 기간 2년의 월드컵대표 전임감독이 되었다.
’도하의 기적’을 일으키며 극적으로 본선에 진출한 김호 사단은 1994 미국월드컵에서 스페인, 볼리비아, 독일과 한 조를 이뤄 2무1패로 탈락했지만 기대 이상으로 선전하며 한국축구의 가능성을 전 세계에 각인시켰다. 대회 후 김 감독은 김영삼 대통령에게 한국축구가 월드컵 등 세계무대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서는 프로축구팀 증설이 절실하다고 건의하여 프로축구 팀이 대폭 늘어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당시에는 프로축구단이 통틀어 6개밖에 없었다.
월드컵이 끝난 후 김 감독은 1995년 신생팀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초대감독으로 선임되어 13차례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며 삼성 왕가를 이루었다. 특히 1999년에는 전관왕 달성이라는 금자탑을 세웠다.
2003년 시즌 종료 후 수원 삼성 블루윙즈 감독에서 물러나 한동안 프로 팀과 거리를 두고 숭실대학교 축구부 총감독 생활을 하던 김 감독은 2007년 대전 시티즌 구단의 지휘봉을 잡아 2009년까지 이끌었다. 김 감독은 K-리그 역사상 가장 많은 541경기를 지도하는 감독이 되었으며 프로축구 통산 207승을 거두었다.
김 감독은 축구에 대한 사랑과 함께 고향에 대한 애정도 각별하다. 대전 시티즌 감독 시절 축구단을 이끌고 통영에 동계 전지훈련을 왔다. 꽉 짜인 훈련 스케줄 속에서도 짬짬이 시간을 내어 통영중,고 후배들에게 축구 지식과 노하우를 전수하였으며 지역 축구인들과 고향 지인들을 만나 통영 축구발전 방안에 대해 의논하기도 했다. 이후 2015년 용인시 유소년축구센터 총감독이 되었을 때도 선수단 150여 명을 이끌고 동계 전지훈련 차 통영을 찾기도 했다.
외지에서 선수와 감독 생활을 하면서도 언젠가는 고향에서 축구 꿈나무를 키우겠다는 생각을 해 온 김 감독은 대전 시티즌 감독직에서 물러나 야인 생활을 하고 있던 2009년 7월, 당시 진의장 통영시장이 통영시가 운영하는 유소년축구클럽 총감독직을 맡아달라는 권유를 하자 2012년까지 코치진 4명과 함께 150여 명의 꿈나무들을 가르쳤으며 이 기간 동안 지역 중고생 80여 명도 틈틈이 지도했다.
2017년부터 2019년까지 대전 시티즌 대표이사를 역임하기도 했던 김 감독은 그동안 인재 발굴과 육성에도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동래고 감독시절에는 정용환을 비롯한 12명의 국가대표 선수를 길러 냈으며 2010년 아시아축구연맹(AFC)은 김 감독을 ‘한국 감독들의 아버지’라고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조광래, 최강희, 왕선재, 윤성효, 최덕주 감독 등이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혹 요즘 눈여겨보고 있는 축구 재목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망설이지 않고 “스피드, 심폐기능, 신체조건을 두루 갖춘 데다 공부도 1등 할 만큼 지능이 좋고 인성도 괜찮은 대성할 재목이 있다”며 “몇 년 후면 윤곽이 드러날 것”이라고 했다. 인재를 발굴하고 키우는 일에 지금도 관심과 열정을 갖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의 능력과 방식으로 많은 성취를 이루어 온 김 감독은 ‘만년 야당’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한국축구에 대해 쓴 소리도 마다 않고 정문일침도 가한다. 지금도 밤에는 어김없이 TV를 통해 해외축구를 보면서 세계축구의 흐름과 기술을 관찰하고 분석한다는 김 감독은 한국축구가 세계적 수준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시설과 기술, 행정 등이 두루 선진화 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특히 축구협회의 행정쇄신과 적극적인 투자를 강조한 김 감독은 축구인 출신이 축구행정의 수장이 되는 것도 필요하다는 개인적인 의견을 피력했다. 또한 이번 카타르 월드컵에서 나타난 한국축구의 문제점을 철저히 분석하고 연구하여 한국 축구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보고서를 만들어야한다고도 했다, “일본축구가 30년 전부터 유소년 축구인재 육성을 비롯 장기적인 계획 하에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접근을 한 결과 오늘날 세계적 기술 수준에 근접하고 있음을 교훈으로 삼아야 합니다.”
오늘날 지역 일각에서 거론되고 있는 통영 축구회관 건립에 대해서는 “비록 한참 늦었지만 통영에서는 축구뿐만 아니라 배구, 태권도, 복싱, 카누, 사격 등 여러 종목에서 국가대표 등 훌륭한 체육인이 많이 배출된 만큼 체육회관을 건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지난 5일부터 통영에서 열리고 있는 ‘제19회 1,2학년 대학축구대회’ 참관 차 고향을 방문한 ‘살아있는 전설’은 비록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백발이 성성해졌지만 축구에 대한 열정과 고향에 대한 사랑은 여전해 보였다.